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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는 살아 있다-1> '친일파'는 민족반역자를 말한다

편지해/온달 2011. 10. 2. 22:23


  • <친일파는 살아 있다-1> '친일파'는 민족반역자를 말한다

    [신간] <친일파는 살아 있다> 2011/09/30 08:00 정운현

    저의 신간 <친일파는 살아 있다>(책보세 펴냄)가 마침내 출간되었습니다. 약속대로 제 블로그를 통해 이책의 전문을 공개합니다. 독자 여러분 가운데는 해외에 거주하고 계시거나 또 더러는 책을 사볼 수 없는 사정인 분도 계시다고 여겨 출판사의 양해를 얻어 전문을 이곳에 공개키로 하였습니다. 전체 분량은 200자 원고지 1,400매 분량이며, 항목수는 총 84개, 항목당 원고량은 대략 10~15매 정도입니다. 부족한 점에 대해서는 독자여러분들의 따가운 지적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필자 주>
        


    ‘친일파’란 반만년 우리 역사 가운데 100년 남짓한 근현대사에서 등장한 역사 용어다. 보통명사 ‘친일파’의 사전적 의미는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개인이나 집단”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러나 친일파는 우리 사회에서 해방 전후의 시대적 상황과 한국인의 민족감정이 뒤섞여 복합적이고 논쟁적인 역사 용어가 되었다.

    구한말 즉 조선왕조가 막을 내릴 무렵인 대한제국 말기의 조선은 나라 안팎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안으로는 무능력한 구체제와 탐관오리의 발호로 사회가 부패하고 혼란해 국기가 극도로 문란한 상황이었다. 또 밖으로는 이웃 일본과 러시아를 비롯해 서구 열강 세력들이 문호개방을 압박하면서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기득권층인 권력집단과 지식인 계층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하나는 제국주의 열강에 맞서 나라를 지켜내야 한다는 수구파와 반대로 과감히 문호를 개방해 서구 신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개화파가 그들이었다. 이들 두 집단의 주장은 나름대로는 일리가 있었으나 그 시대 상황에서는 세계사적 흐름인 ‘개화(開化)'의 물결을 거스를 수는 없다는 것이 시대적 대세로 받아 들여졌다. 친일파는 바로 이 지점에서 생겨났다.

    당시 개화파 세력의 상징인 김옥균(金玉均)은 이웃 일본의 근대 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의 개화를 추진하고자 했다. 따라서 김옥균 등 개화파 세력을 초기 친일파 혹은 원조 친일파라고 한다. 그러나 김옥균 등 개화파를 요즘 사용되고 있는 친일파의 의미와 등치시키는 것은 다소 무리 가 있다. 왜냐하면 당시 개화파는 열강들 가운데서 일본을 이용하기 위해 ‘친하게’ 지낸 집단이었다. 즉 그들의 친일은 당시의 여러 외교 노선(세력) 가운데 하나였다.

    친일 개화론자 김옥균


    당시 조선에는 개화파(친일파) 이외에도 여러 부류의 친외세 노선들이 있었다. 우선 오랜 세월 동안 유대관계를 맺어온 중국(청나라)에 여전히 호의와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친청파, 을미사변 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소위 '아관파천') 후 급격히 부상한 이범진(李範晋) 등의 친러파, 그리고 서구 열강 세력 가운데 가장 밀도 있고 조직적으로 세력을 확장해온 미국을 등에 업은 친미파 등이 그들이었다. 외국과 수교를 맺고 외교관계를 지속하는 이상 이 같은 노선(부류)이 생겨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친일파의 의미는 일본 군국주의 세력의 조선 침략을 도운 매국노나 그들의 수족 노릇을 한 부일(附日)반민족 세력을 일컫는다. 시기적으로는 대략 1904년 러일전쟁 이후부터 1945년 일제 패망 때까지 활동한 자들이다. 매국노(賣國奴)란 1905년 을사늑약, 1910년 한일병탄조약 등 매국 조약 체결에 협력한 자들을, 부일배(附日輩)란 35년간의 총독정치하에서 공직이나 각종 단체 등에 참여해 일제에 적극 협조한 자들을 말한다. 이들 대다수는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부와 권세를 누렸으며, 그 기득권은 후손들에게 대물림되었다.

    친일파는 ‘빨갱이’와 함께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자극적이며 또 현재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역사 용어다. 빨갱이가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좌우 대립과 갈등에서 생겨난 이념 논쟁의 산물이라면 친일파는 해방 후 과거사 청산에 실패한 민족적 비원(悲願)을 담은 역사 논쟁의 산물이다. 일제가 패망한 지 60년이 넘었지만 한국 사회는 아직도 일제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친일파 청산은 흐트러진 민족정기를 곧추 세우는 일이자 동시에 수치스런 역사에서 교훈을 찾으려는 노력의 일환이다.